반복강박과 죽음충동
프로이트, 『쾌락원리의 저편』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우리들은 주저하지 않고, 정신 과정의 진행은 쾌락원리(Lustprinzip)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규제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곧 우리들은 다음 처럼 믿는다. 즉 정신 과정의 진행은 매번 불쾌한 긴장에 의하여 활발하게 되며, 그러한 진행의 최종 결과는 그와 같은 긴장의 완화, 말하자면 불쾌감의 회피나 쾌감의 산출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1」정신분석학의 기념비적인 논문 『쾌락원리의 저편에서 프로이트는 첫 문단을 정신분석학이 그동안 명시해놓은 원칙을 기술하는 것에 할애한다.
그는 성충동에서 쾌락을 찾으므로, 쾌락 원칙에 따르는 무의식은 자신의 성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것이 대상애이든 나르시시즘이든 행위에 따르고자 한다고 본다. 이러한 쾌락원리에 반하는 것이 현실원리(Realitätsprinzip)로써, 가령 프로이트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접목시켜보자면, 근친충동을 억제하는 아버지의 법률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연쇄적 은유로서의 사회적·문명적 질서가 현실원리를 형성하며, 충동은 일방적으로 억제되거나, 혹은 아주 긴 우회로를 거치게 된다. 가령 예술 같은 승화의 형태에 도달할 때까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근친충동은 억제된다. 그것이 경제적 활동이나 명예, 혹은 예술의 형태로 승화되어 배출된다손 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근친충동 자체에 대한 욕망은 좌절되고 철회된 상태가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승화는 일종의 진통제에 가깝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쾌락 원리에 따라야할 무의식이 스스로의 충동을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서 해명해야만 했는데, 여기서 무의식은 그 어떠한 불쾌도 차단하려는 항상성의 원리를 따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종래에 성충동으로 일관됐던 쾌락의 형태가, 그보다는 에피쿠로스주의에서 볼법한 금욕적 쾌락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과음의 쾌락은 이후의 숙취라는 더 큰 고통을 유발하므로,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 금욕적 형태가 역설적이게도 큰 쾌락이라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이제부터 무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모든 신경적 자극을 피하려는 속성은 자기보존본능과 엮인다고 여겨지며, 현실원리에 의거해 불쾌를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충동들은 쾌락원리의 이름으로 억압된다. 여기서 억압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도 잘 보여줬던 쾌락을 불쾌로 교묘히 조작하는 검열-메커니즘을 따른다.「억압으로 하여금 쾌락의 가능성을 불쾌의 원천으로 변화시키게끔 하는 상세한 과정은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거나 명쾌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모든 신경증적 불쾌는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며,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이다.
그렇다면 쾌락원리는 성충동과 같은 현실원리를 위배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프로이트는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이라는 역설적인 표현까지 구하며 봉착한 문제의 난감함을 토로한다. 쾌락원리가 현실원리에 부합하고자 노력하는 보수적 메커니즘을 가진다면, 무의식적 충동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제기하게 만든 임상사례는 <반복강박 이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귀환한 군인들이 일상으로 돌아왔음에도 전쟁터에서 겪었던 트라우마(traumatisch)를 반복하며 고통 받는 경우들이 많아졌는데, 이는 종전상황이라는 현실원리를 배척함과 동시에 쾌를 찾으려는 쾌락원리에도 어긋나는 불가해한 사례였다.
환자가 정확히 이러한 반복강박의 원인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적 충동의 발로이긴 했으나, 정확히 무엇을, 왜 반복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표가 붙어졌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불쾌 혹은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의 회귀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에 프로이트는 이론의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려는 중차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반복가박의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보기에 이 반복강박은 반복강박이 옆으로 밀쳐놓은 쾌락원리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기본적이며, 더 충동적이다. 그러나 만일 그와 같은 반복강박이 정신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기꺼이 그것에 관해서 어떤 것을 알고자 하고, 반복강박이 어떤 기능에 해당되는지,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 그렇지만 지금까지 정신적 삶의 흥분과정의 진행을 지배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믿었던 쾌락원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
이제부터 그는 <쾌락원리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기본적이며, 더 충동적>인 무의식의 새로운 지층을 향한 탐사에 나설 것임을 천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쾌락원리 이전의 심층적 충동은 무엇인가? 우선 프로이트이는 반복강박을 구성하는 트라우마에 대해 뜯어본다. 트라우마는 쾌락원리에 극단적으로 반하는—상식이나 생존 자체를 뒤흔드는—외상적 경험으로, 현실원리가 무너진 상황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여기고 기꺼이 복종했던 아버지의 법률과, 그 질서에 속하기 위해 무의식적 충동들을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으로 재포장하며 유폐시켰던 일련의 방어기제들은…… 단번에 그 실효성을 잃어버린다. 현실원리와 방어기제 모두 억압에 기초하는데, 이러한 억압을 작동시키는 보상체계가 부정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비도 반대 집중(Gegenbesetzung)을 통해 붙잡고 있던 대체표상들도 무너지며,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실 그 자체가 무너진다. 프로이트 역시도 트라우마를 방어기제와 같은 보호막의 파열의 결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왜 자꾸 반복하는가? 여기서 반복강박은 그 상황에 대한 반복을 통해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환자가 보여주는 극도의 공포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극단적인 상황들로 미루어보아 섣불리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환자는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 자살을 감행하거나, 혹은 이웃을 적군이라 간주하여 사살하는 착란을 일으키기도 하니깐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악마적 행동>으로까지 규정될 정도인데, 현대적인 정신의학에선 단순히 <보호막의 파열>로서 정신을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현실원리를 회복시키려는 치료가 주를 이루게 된다. 인지행동치료, 약물치료, 게슈탈트 치료 등등…… 이는 정신에 대해 신체적 접근을 하는 것인데―서구의 의학전통에 따라 해부학적으로 정상에서 어긋난 부분을 외과수술로 해결하고자 하는―모두 철저히 현실원리와 쾌락원리에 의거한 자기 보존 충동을 공리로 받아들이는 발상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지점에서 전통과의 단절을 선고한다(그래서 여기서부터 모든 생명과학과 심리학으로부터 과학이 아니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그는 논문의 처음부터 예고했듯이 쾌락원리나 자기보존본능 그 이전에 존재하는 어두운 충동들에 대한 탐구를 할 것임을 밝혔고, 따라서 여기서 <죽음충동(Todestrieb)을 제시하고자 한다.「모든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서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생명 없는 것이 생명체보다 먼저 존재한다.4」이에 대한 여러 생물학적이고 계통발생학적인 견해들이 제시되지만, 무엇보다 유의미하게 조명되어야할 바는, 이러한 죽음이 사실상 쾌락원리의 역설적인 귀결점이라는 점이다.5 항상성의 원칙에 종속된 쾌락원리가 무자극의 상태를 욕망한다면, 궁극적인 안식은 오롯이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제부터 성충동은 유전자의 전달을 통해 불멸성을 확보하려는 에로스(Eros)적 충동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자아충동>과 성충동 사이의 예리한 대립을 제시하며, 자아충동을 죽음으로(zum Tode), 그리고 성충동을 생명의 연속(Lebensfortsetzung)으로 밀어붙였다.」종래에 의식/무의식으로 양분되어 있던 이원론이 새롭게 재정립된 것이다.6
「우리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원론적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이전보다 한층 더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립들을 더 이상 자아충동과 성충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생명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라고 부른다.7」
이러한 이원론에 의거했을 때 반복강박이란, 죽음충동의 발로로써 트라우마 상황을 반복함으로써 죽음을 앞당기려는, 일종의 영원한 안식을 향한 투쟁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개체가 위협받은 상황이 아닌, 계속해서 현실을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사건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개체는 안식을 위해 죽음을 욕망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억압된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은 에로스를 정지시키려는 충동이 된다. 혹은 자기 주체에 대한 검열과 처벌-죄책감으로서 작동했던 사디즘이, 다시 역류하여 개체를 죽음으로 이끌려는 데에 봉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여기서 마조히즘은 죽음의 순간에 느껴지는 관능적 미학이나 안식에 봉사하는 쾌감으로 전유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반복강박은 질병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1차 세계대전의 악몽 때문에 문명세계에 대한 희망을 잃었던 병사들이, 아이러닉하게도 그 이후에 터진 2차 세계대전을 목도해야만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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